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경궁 홍씨 (문단 편집) === 부자간의 갈등 === [[영조]]는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유일한 [[조선/왕사|후계자]]였던 [[사도세자]]에 대한 큰 기대와 두 부자간의 [[성격]] 차이 등 두 부자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. 한때는 [[사도세자]]가 [[정신병|광증]](狂症) 때문에 [[내시]]들과 [[궁녀]]들을 무차별적으로 마구 [[살해]]하자 시어머니 [[영빈 이씨]]에게 가서 같이 울면서 의논했는데 [[영빈 이씨]]가 "[[영조|주상 전하]]께 이야기하는게 어떻냐"고 묻자 대경실색하면서 "[[영조|왕]]에게 [[사도세자|세자]]를 헐뜯은걸 [[사도세자|세자]]가 알면 살아남을 수 없다"고 말하면서 뜯어말렸다는 이야기가 있다. [[세자빈]]인 혜경궁 홍씨도 [[영조|시아버지]]와의 갈등 때문에 점점 미쳐가는 [[사도세자|남편]]을 말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. 《[[조선왕조실록]]》에도 [[정신병|광증]](狂症)을 나타내는 서술이 있다. 단, 광증이 기록된 시작점이 [[1761년]](영조 37년)이며, [[사도세자]]는 1년 후인 [[1762년]](영조 38년)에 죽었고 [[대리청정]]을 무려 14년이나 한 사람이라는건 기억해두자. [[내시]]나 [[궁녀]]등을 100여명이나 죽여버리는 일을 저질렀고 그 설명은 [[조현병]]으로 보이는게 분명한 서술들이 나오는데 [[사도세자]] 본인도 장인 [[홍봉한]]과의 서신에서 본래 있던 화증(火症, 울울하고 답답하여 일어나는 병세)이라고 말했다. > [[천자]](天資)가 탁월하여 [[영조|임금]]이 매우 [[사랑]]하였는데,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[[학문]]에 태만하게 되었고, '''[[대리청정|대리]](代理)한 후부터 [[질병]]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'''.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(臣民)들이 낫기를 바랐었다. [[1757년|정축년]] ·[[1758년|무인년]] 이후부터 '''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[[궁녀|궁비]](宮婢)와 [[환관|환시]](宦侍)를 죽이고,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.''' [[영조|임금]]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, [[사도세자|세자]]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. [[영조|임금]]이 [[경희궁]](慶熙宮)으로 이어하자 [[영조|두]] [[사도세자|궁]](兩宮)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, 또 [[환관]](宦官)·[[기생|기녀]](妓女)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(遊戲)하면서 하루 3차례의 문안(問安)을 모두 폐하였으니, [[영조|임금]]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[[자식|후사]]가 없었으므로 [[영조|임금]]이 매양 [[조선/왕사|종국]](宗國)을 위해 근심하였다. >---- >- '''《[[영조실록]]》 99권, 영조 38년([[1762년]], 청 건륭(乾隆) 27년) 윤5월 13일 (을해) 2번째기사''' > 한참 후에 [[사도세자|세자]]가 [[상복|입]](笠)과 [[곤룡포|포]](袍)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[[영조|임금]]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,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. [[영조|임금]]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, >“'''네가 [[경빈 박씨(장조)|왕손(王孫)의 어미]]를 때려 죽이고''', [[비구니|여승(女僧)]][* '가선(假仙)'이라는 [[이름]]의 [[여승]]. [[사도세자]]는 [[평안도]]에 갔다가 [[비구니|여승]]이던 가선을 데려와 자신의 [[후궁]]으로 삼았다. [[사도세자]]가 [[임오화변|뒤주에 갇혀 죽은]] 후, 가선은 [[사도세자]]를 모시던 [[내시]] 박필수(朴弼秀) 및 5명의 [[기녀]]들과 함께 [[참수형|참형]]에 처해졌다.]을 [[창경궁|궁]]으로 들였으며, [[평안도|서로(西路)]]에 행역(行役)하고, [[평양|북성]](北城)으로 나가 유람했는데, 이것이 어찌 [[사도세자|세자]]로서 행할 일이냐? [[신하|사모를 쓴 자들]]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[[나경언]]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? [[경빈 박씨(장조)|왕손의 어미]]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[[우물]]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,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?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,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(諫)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[[살해|죽임]]을 당했을 것이다. 또 장래에 [[여승]]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. 이렇게 하고도 [[조선|나라]]가 망하지 않겠는가?” >하니, [[사도세자|세자]]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[[나경언]]과 면질(面質, 죄의 여부를 대질함)하기를 청하였다. 임금이 책망하기를, >“이 역시 [[조선|나라]]를 망칠 말이다. [[대리청정|대리]](代理)하는 [[사도세자|저군]](儲君)이 어찌 [[나경언|죄인]]과 면질해야 하겠는가?” >하니, [[사도세자|세자]]가 울면서 대답하기를, >“이는 과연 '''[[사도세자|신]]의 본래 있었던 [[화병|화증]](火症)입니다'''.” >하매, [[영조|임금]]이 말하기를, >“차라리 '''[[발광]](發狂)'''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?” >하고, 물러가기를 명하니, [[사도세자|세자]]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(禁川橋) 위에서 대죄하였다. >---- >- '''《[[영조실록]]》 99권, 영조 38년([[1762년]], 청 건륭(乾隆) 27년) 5월 22일 (을묘) 2번째기사''' >[[평양시|평양]] 사람 이갑(李甲)이 용력이 있었는데 [[환관]]을 통해서 [[사도세자|동궁]]을 모시게 되었다. (그가) 일찍이 말하기를. >>"[[사도세자|동궁]]이 어떤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심화가 치밀어 오르자, 철편(鐵鞭)을 휘둘러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맞아 죽었다. 애증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 마치 [[날씨]]가 갠 날에 밝았다가 어두운 [[구름]]이 갑자기 가리는 것과 같았다" >---- >- '''《玄皐記(현고기)》'''[* [[박종겸]]이 쓴 [[소론]] 준론계 당론서. 시종일관 [[사도세자]]에 우호적이고 [[노론]]에게 적대적이지만, [[사도세자]]의 병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.] >'''[[사도세자|세자]]가 [[환관|내관]], [[내시|내인]], [[궁녀|하인]]을 죽인 것이 거의 100여 명이오며,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[[형벌]]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''' 지난번 '''제가 [[창덕궁]]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''' 겨우 제 [[몸]]의 화는 면했습니다만, 지금 비록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[[영조|임금]]의 몸(玉體)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? >---- >- '''《廢世子頒敎(폐세자반교)》'''[* 정병설, [[http://cafe.naver.com/mhdn/29204]]에서 재인용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